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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많은 것을 몰고 오곤 했다. 복수라는 복잡한 기반을 둔 전쟁은 혼돈과 죽음이라는 형제들을 몰고 나타나 대지를 휩쓸었다. 인간들은 서로를 죽고 죽이며 살아남기를 바랬다. 신전에 울려퍼지는 울음소리와 비명소리는 올림포스에 닿아 헤르메스의 종소리처럼 신들을 불러 일으켰다. 인간의 손이건, 신의 손 안에서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넓은 평야에 고꾸라진 것은 종류도 다양했다. 말을 끌던 마부와 전사. 궁수와 그가 타고 있던 말. 황금으로 치장했던 갑옷을 빼앗긴 채 목이 부러진 왕족. 인간의 계급이 어떠했던, 그것이 짐승이건 곤충이건. 무한한 죽음 앞에서는 무엇이든지 평등했다.
지하세계의 다섯 강은 여전히 수많은 망자들의 울음소리를 담고 회색으로 흐르고 있었다. 죽은 자들의 숨결이 안개가 되어 그 강변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저승의 왕은 다섯 강을 지나고, 선한 자들의 낙원인 일리시온과 무한지옥 타르타로스의 입구에 세워진 왕좌에 등을 기댄 채 누워 있었다. 살아있을 적에는 영웅이고 예언자이며 신의 자식들이었을 영혼들의 그의 왕좌 주변을 장식하듯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 옷자락과 함께 늘어뜨려지는 긴 은발이 발 아래 끌렸다. 타르타로스의 얼음만큼 시린 눈동자는 푸르게 영혼들을 쏘아보곤 했다.
"올 시간이다."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왕은 몸을 일으킨다. 명왕 하데스는 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영혼들을 자애롭게 맞이했다. 선한 자들은 엘리시온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고, 죄가 무거운 자들은 타르타로스에 갇혀 죽지도 못하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었다. 그때, 명계에서는 맡기 힘든 비릿한 향이 났다. 망자들의 시선이 어둠 속을 향한다. 끝없이 밀려드는 영혼들의 물살이 갈라지고 황금 갑옷을 입은 전쟁의 여신이 나타난다. 황금 투구가 피로 얼룩진 채 여신의 손에 들려 있었다. 창백한 명왕의 살갗에 여신의 손이 닿자, 포도주의 빛깔이 길게 남았다. 아레스가 저승에 발을 내디뎠다. 하데스는 기쁘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맞이했다.
"늦었군. 난 그대가 조금은 더 빠르게 올 줄 알았는데."
전쟁의 여신은 투구를 왕좌 위에 던져버리고 거리낌없이 명왕의 무릎에 가 앉아 앉는다. 황금 갑옷이 잘게 떨리며 쇳소리를 내었다. 명왕의 손이 핏자국이 얼룩진 여신의 뺨을 어루만져 살갗이 제 색을 찾도록 도왔다. 잘게 입맞추는 입술은 피가 묻어있지 않음에도 붉어 창백한 하데스의 것과 대비되었다.
"날 그렇게 애타게 기다릴 것이었다면 그대가 지상으로 올라왔어야지."
"명왕을 지상으로 불러올렸다가 인간들을 멸족시킬 작정인가. 전쟁의 신이여."
왕좌의 팔걸이에 기댄 여신의 허리를 저승의 신이 끌어당겨 안는다. 태양에 그을린 듯한 살결을 차가운 손으로 어루만진다. 전쟁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몸은 그 서늘한 품에서도 열기를 띄었다. 그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묻자 여즉 얼룩진 핏내가 선명하다. 차가운 입술이 갑옷이 미처 가리지 못한 목덜미를 지분거린다.
"오늘도 내 백성이 늘어만 가는군. 그대 덕이지. 아레스. 여길 가득 채울 셈인가 봐."
"오-, 하데스. 지하 세계는 넓고, 아직 할 전쟁은 수없이 많아. 당신이 받아들여야할 영혼의 수도 아직 셀수 없이 많단 말이야."
"내가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아질 것이라는 말이겠지. 올림포스에는 언제 올라갈 참이지?
"곧. 시간이 별로 없어."
"그럼 그 시간을 조금 더 아껴 쓰는 법을 터득해야겠군. 아니면 조금 더 일찍 찾아와 보는 건 어때."
좁은 왕좌 위에서 둘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자리했다. 짙어지는 안개 속에서 황금 갑옷과 포도주잔이 바닥에 구르는 소리가 났다. 주위를 에워싸던 영혼들은 기세에 눌려 어둠 속으로 흩어지고 난 후였다. 저승은 여전히 푸르고 어두운 빛에 감싸인 채 그 신들을 방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