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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hey live happly ever after?

마늘_마블 2017. 8. 21. 01:03

소년은 쓰레기가 발로 치이는 뒷골목에서 살았다. 신의 집에 갇혀 살았던 것과 그렇게 다를 바 없는 삶이라고들 하였지만, 담배를 꼬나물고 가끔 병째 맥주를 들이키는 것이 따듯한 수프와 조금 더 말랑한 빵을 씹는 것보다 나았다. 소년은 가끔 길거리를 지나가다 꽃을 보았다. 장미, 안개꽃과 히아신스. 리시안셔스, 데이지. 소년은 가끔 그 하얗고 빨갛고 노란 것들을 마른 시선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알록달록한 것들이 제 손에 들어올 일은 죽어서도 없을 것이라고 자부하면서. 


가끔 꽃가게가 문을 닫은 날, 문 앞에 시들어져 버려진 꽃이 하나 둘 눈에 띈 적도 있었다. 소년은 여린 그것들을 발로 짓밟았고, 힘이 없는 것이라 그리 자신을 위안했다. 꽃잎이 강했더라면, 자신에게 밟혀 으스러지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소년은 그 사실에 만족했고, 더 바라지 않았었다. 


소년은 교회와 성당의 십자가라는 십자가는 모두 부수고 다녔다. 십자가는 소년에게 늘 나쁜 기억만 되새김질하도록 만들었다. 신은 없었다. 자신을 아르젠팔토라로 데려온 파리스는 늘 자신에게 무언가 믿는 것이 하나쯤은 있으면 좋을 거라고 일러두고는 했지만,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모아대는 그 수많은 곰인형이 신이라면, 신은 퍽 하찮은 존재로구나. 소년은 생각했다. 무언가 하나쯤 믿어도 좋을지 몰라.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언젠가는 하나쯤 다시 생기겠지. 당신처럼 곰인형이라던가, 권총이라던가, 아니면 저기 골목에서 파는 핫도그라던가. 소년이 작게 웃었다. 파리스는 그 웃음을 보고 웃었다. 


타 조직과의 큰 마찰이 있던 날이 있었다. 파리스가 죽어서 돌아온 날, 소년이 본 것은 천으로 가려진 그의 몸뚱이와, 부서진 의수를 덜렁이며 달고 있는 그의 오른손이 전부였다. 그래도 미카엘이 죽었을 때보단 낫구나. 소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조원들이 관 위에 장미꽃을 하나씩 올려놓고 물러날 때에, 소년은 작은 곰인형 열쇠고리를 그 꽃 위에 올려두었다. 파리스의 자리는 소년의 것이 되었다. 소년이 입던 해진 자켓은 버려졌고, 더 넓어진 어깨 위에 파리스의 자켓이 덮였다. 


소년은 성경을 찢어 불을 피웠다. 가죽 표지가 타는 냄새가 역했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토기를 억눌렀다. 푸른 눈동자에 붉은 불길이 뜨겁도록 넘실거렸다. 난 이제 무얼 더 믿어야 해? 당신이 믿던 인형들은 당신의 관과 함께 재가 되었어. 나는 당신을 믿었는데, 당신도 가 버렸네. 내가 말했잖아. 사람이 무얼 믿는 것만큼 가장 부질없는 건 없다고. 하지만 이제 말해봤자 당신은 내 말을 들을 수 없겠지? 소년은 불길에 말없이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은, 타오르는 불길에 자신을 버리고 청년이 되었다. 



***




나는 가만히 칼을 움직였다. 도마에서 썰리는 야채는 무슨 죄였을까. 팬에서 볶아지는 냄새 좋은 것들도. 우리는 말이 없었다. 당신은 내 뒤에서 턱을 괸 채 앉아 있었고, 나는 당신에게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내가 당신을 뒤돌아 보았을 때, 당신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입술이 가만 올라간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착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묘했다. 


식사는 조용히 끝났다. 촛대에 꽂힌 불길이 가만 일렁였다. 당신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에게 다가간다. 배웅에 가까운 발걸음이었다. 당신이 뒤돌아 보기 전까지는. 아. 당신은 장미꽃을 든 채 다시금 되돌아 걸었다. 다섯 걸음의 거리를 두고 있던 우리는 금세 세 걸음만큼의 거리로 가까워졌고, 바로 그 뒤를 이어 한 걸음의 거리로 좁혀졌다. 당신의 향기가 장미꽃의 향기와 섞여 코를 간지럽혔다. 


당신은 속삭였다.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는 말이 없었다. 초침이 두어 개의 칸을 움직일 때까지. 



당신의 눈동자에 담긴 빛을 보았다. 그 빛 안에는 언제나 내가 담겨 있었다. 우리는 함께 천국을 보았고, 함꼐 나락으로 떨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서로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나의 날개이자 악마이고, 가시를 지닌 꽃이며 순백의 첫눈이었다. 나는 웃었다. 입술이 가벼이 말려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당신의 눈동자에 담겼던 빛처럼 맑은 것이 들어가 있었다. 당신은 언제나 내가 할 말을 먼저 해버리고 만다니까. 


"내 영혼은 언제나 당신 것이었는데, 말하지 않았던가."


꽃다발을 쥔 당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검은 벨벳 상자가 아가리를 열었다. 작은 보석이 박힌 반지가 진주마냥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처음으로 꽃을 품에 안아보고 싶어졌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델리시아 마리아 아브레고. 

 

사일러 블랙이, 지금 당신에게 청혼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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