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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화가 났다. 속에서 끓어오는 분이 쉬이 가라앉질 않아 허수아비가 부러지도록 검을 내리친 것이 벌써 반나절이나 지난 채였다. 누가 그랬단 말인가. 황자의 궁에 독을 들인 자가, 감히. 어느 멍청한 놈이 제 간을 배밖으로 달고 다니느냔 말이다. 고르지 않은 숨이 검날에 배어들었다. 랑이 깨어난지 며칠이 지났지만서도, 한은 여전히 그 불안감을 지워낼 수가 없었다. 지독하게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릴적부터 단 한번도 떨어진 적 없었기에, 네 자리라는 것이 제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한은 뼈저리게 체감했다. 네가 회복될 때까지 월명궁에서 절대로 내보내지 말라며 명을 내리고, 한은 다시금 제가 있었던 그 생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짐에 뒤를 돌자, 황태자비가 시종들을 데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여인은 여전히 고왔고, 나긋했다. 배에 제 씨를 품었다는 사실 때문일까, 한은 연신 굳어있던 얼굴을 조금 풀어낼 수 있었다.
"지나침은 좋지 않습니다. 황태자시여."
여인은 한의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을 시종에게 건네받은 물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검은 눈이 서로 마주했다. 한은 그저 힘없이 미소지었다. 이정도로 힘이 들 거라면, 어찌 황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체력 단련이니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겝니다. 굳은살 박힌 손이 황태자비의 손을 가만 마주쥐었다. 태자비께서도 부디 몸조심하세요. 홀몸이 아니지 않으십니까. 사내의 목소리가 가만 속삭였다.
"그래야지요. 아이가 아버지의 얼굴이 빨리 보고 싶은가 봅니다. 이리 빨리 들어선 것을 보면 말이에요."
"태자비를 닮아 고울 겝니다."
"황태자를 닮아 늠름할 테고요. 아. 저하, 외람되오나 하나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금한 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태자비. 한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태자비는 월명궁이 어디냐며 물었다. 시녀가 말해주길 거기 연못과 정자가 그리도 아름답더라- 며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말까지 덧붙인 채. 한은 잠시 침묵했다.
"나중에, 같이 가 봅시다. 다른 누구의 궁도 아닌, 내 궁이니까요. 게다가 지금은 오랫동안 쓰지 않아 먼지가 쌓였을 겁니다. 시종들을 불러 깨끗하게 해 두어라 하지요."
태자비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제 지아비가 하는 말에 무어라 토를 달지는 않았다. 한은 그렇게 매화궁으로 돌아가는 태자비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월명궁. 그 궁을 입에 올린 태자비의 시녀가 누군지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잠시나마 난 시간, 한은 시종을 물리고 다시금 월명궁을 찾는다. 네가 잠들어 있을 것을 의원에게 전해들었다. 깊은 잠에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네가 깨어있더라도 상관은 없었을 테였다. 창호지 너머 고요한 방 안. 문 안쪽에서 너는 잠들어 있었다. 네가 잠든 모습을 얼마만에 보는 걸까. 너는 늘 내가 잠들때면 이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더냐. 한은 가만 입술을 깨물었다.네가 나를 그리 지켰듯이, 나도 너를 그리 지킬 것이다. 랑아. 속으로 속삭였다.
시간이 흘렀다. 궁에 큰 바람이 불었다. 황제께서 돌아가셨다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의의 말에 따르면 병이 지난 밤새 급작스레 악화된 듯 보였다고 한다. 즉위식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이루어졌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와중, 한은 단 한번도 웃지 않았다. 신하들을 발 밑에 두고 선 사내. 면류관의 발로 가려진 얼굴이 무심했다. 황태자비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지만, 한은 끝내 웃지 못했다. 지나간 밤들의 기억만이 그의 머릿속에서 구역질처럼 넘어온다.
'그래서, 그 독이 유통되는 곳을 알아 보았느냐.'
방 안에는 한과 의원, 그리고 자객처럼 분장한 호위 서넛이 자리하고 있었다. 랑이 먹은 독을 쉬이 구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의원이 털어놓은 독에 대해 천천히 뒷조사를 행한 결과, 충분히 짐작할 만한 사람이 물망에 걸렸다. 한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방 안은 적막으로 가득했고, 그것을 시작한 사람은 손짓으로 혹여 소음의 원인이 될 자들을 내보낸다. 보름달이 밝았다. 지나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