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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러 어릴적

마늘_마블 2017. 7. 10. 01:15


소년의 어렴풋한 기억은 고아원에서 시작되었다. 길에서 주워진 아이들의 유일한 집이자 세상의 전부였던 곳. 차갑게 식은 수프와 쥐가 돌아다니는 침실이 다였지만, 적어도 그곳의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잠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행복해하곤 했다. 절대 펴지지 않을 것 같은 곱슬머리를 머리 위에 얹고, 매부리코 위에 검은 사마귀가 크게 난 원장은 가끔 아이들에게 사소한 이유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곤 했다. 예를 들어 쥐가 자신의 박하사탕을 깨물어 먹었다던가, 예뻐보이겠다고 원피스와 맞추어 신은 구두가 문턱에 걸려 발목을 삐끗했다던가. 그때마다 아이들은 원장에게 잡혀 다락방에 갇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숨었다. 소년은 단 한번도 원장에게 잡힌 적이 없었다. 오히려 원장을 화내게 한 원인이 되고서도, 그 실마리조차 주지 않은 채 몰래 웃는 경우가 많았다. 원장이 아끼던 보석 브로치는 전당포에 맡긴 지 오래였고, 그녀가 아끼던 만년필은 뜯어진 마룻바닥 아래 숨겨두곤 킬킬거렸다. 물론 전당포로 간 원장의 물건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소년은 치밀했고, 교활했다. 


"이 아이랍니다."


어느 날, 소년은 원장이 자신을 자동차에 태워 시내로 데려가는 것을 가만 내버려 두었다. 자동차를 타고 어느 바(bar) 로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두 사내가 원장의 인사를 받았다. 모자를 쓴 사내와, 지팡이를 든 사내였다. 


"우린 튼튼한 아이를 원했습니다. Miss 라일라."


사내들은 소년의 자켓을 벗기고 골격을 더듬었다. 얘는 마른것 뿐이에요. 우리 고아원에서 가장 활발하고 건강한 아이랍니다. 원장은 웃고 있었다. 소년은 사내들과 원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모자를 쓴 사내는 아이의 푸른 눈을 가만히 마주했다. 아이야. 너는 신을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느냐. 소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은 이미 건물을 들어오기 전에 아이에게 일러 두었다. 모든 말에 긍정을 표해라. 안 그러면 이 시내에 널 두고 갈 거야. 아이는 더럭 겁이 났다. 자신이 모르는 곳은 익숙하지 않았다.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이었으며, 두려움은 불안이 되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두 살이라고 했지?"


지팡이를 든 사내가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소년은 아직 열살이었지만 그 사실을 구태여 밝히지는 않았다. 원장이 제 등 뒤에서 허리를 날카로운 손톱으로 찔러대었다. 사내는 간단한 질문을 몇개 하고는 마주했던 시선을 거두었다. 글자는 읽을 줄 아는지, 예의는 배웠는지. 종교를 가진 적이 있었는지. 아이는 모든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고, 다만 종교를 가진 적이 있냐는 질문에만 고개를 저었다. 소년의 종교는 박하사탕이고, 길고양이며 길거리의 빵 냄새였지만, 사내가 말하는 종교는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좋아요. 우리가 이 아이를 데려가도록 하죠."


지팡이를 든 사내가 원장에게 가방을 내밀었다. 원장은 잉크가 번진 종이 봉투를 사내들에게 내밀었다. 소년이 길에서 주워진 날짜와, 사내들에게 아이를 입양보낸다는 간소한 서류. 그러나 신기한 것은 이름이 쓰여져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오로지 공백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팡이를 든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름이, 없구나."


"아이들은 날 Blacky(블래키) 라고 불렀어요. 그저 내 머리카락이 검다는 이유로요."


소년은 가볍게 입을 열었다. 자신과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의 얼굴이 빠르게 기억을 스쳐지나갔다. 모자를 쓴 사내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서류를 접어 다시 봉투 안으로 집어넣었다. 


"좋아. 아이야. 나는 미카엘이고, 널 입양한 수도사란다."


"...그럼 나는 고아원으로 돌아가지 않는 건가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는 머뭇거렸다. 그러나 원장의 손이 소년을 사내들에게 밀었고, 낡은 운동화를 신은 발은 잠시 비틀거렸다. 걱정 말아라 아이야. 우리는 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고, 너 역시 그리 될 것이란다.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신은 모든 것을 이루어주신단다. 


그렇게 소년은 성 미카엘 수도원의 일원이 되었고, 블래키란 이름 대신 가브리엘이라는 세례명을 가지게 되었다. 소년은 낡은 자켓과 운동화 대신 수도복과 묵주를 건네받았다. 그렇게 신의 이름 아래 살겠다, 그때는 그리 맹세했던 시간이었다. 


***


처음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신기한 일들이 마구 벌어지는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엇다. 조금 더 따듯한 식사. 조금 더 말랑한 빵. 깨끗한 자신의 방. 폭신한 침대. 새벽에 울리는 종소리를 따라 기도를 했고 (사실 기도를 했다기보단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어떻게 꿇어야 덜 아플지를 더 자주 고민했다.) 자신보다 먼저 들어온 수도사들과 성경을 공부했다. 자신을 입양해 온 미카엘 신부는 늘 웃는 얼굴로 자신을 맞이해 주었다. 소년은 모든것이 새로웠다. 적어도 자신의 유일한 버팀목이 죽어버리기 전까지는. 


가브리엘은 어렸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의 책임자인 미카엘이 어린 아이를 데려온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건은 미카엘이 죽거든, 그가 데려온 소년이 그 자리를 꿰어찰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이곳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자신이 곤란해질 때면 늘 미카엘 수도사가 자신을 도와주러 오곤 했으니까. 그러나 그 행복이 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음을 소년은 알지 못했다. 


미카엘은 죽었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수도사들은 미카엘이 관에 들어갈 때까지 소년이 미카엘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것을 막았다. 그의 관 이로 마지막 한 삽의 흙이 덮여질 때, 소년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칼날처럼 자신을 꿰뚫는 것을 느꼈다. 소년은 다시 길바닥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자그만치 5년이 흐른 후였다. 소년이 막 열 다섯살 생일을 앞두고 있던, 그 때. 


수도사들은 소년을 점점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넓은 기도실을 밤새 혼자 청소하게 만들었고, 책을 외워오지 못하면 고해성사실에서 하루종일 무릎을 꿇고 있는 벌을 주곤 했다. 소년은 견뎠고, 또 견뎠다. 자신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천사 나으리. 오늘 청소는 다 하셨나?"


자신보다 덩치가 큰, 그러나 나이는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 사내가 빈정거리며 소년이 들고 있는 대걸레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소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입을 닫고 있는 소년에게 화가 났고, 손을 들어 그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소년은 쓰러졌다.제단에 세게 부딫힌 소년은 앓는 신음을 내었고, 엷은 입술이 터져 피가 배었다. 우당탕-! 갑자기 들려온 소란에, 사내의 동료들이 나타났고, 소년은 그들을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사내는 소년이 자신에게 덤벼들었다며 거짓말을 했다. 사내의 동료들은 화를 내며 소년을 추궁했다. 소년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


소년은 사흘 만에 눈을 떴다. 자신의 방, 침대 위였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눈을 떴다는 감각보다 먼저 찾아왔다. 지독히도 쓰라린 통증. 자신의 등을 빈틈없이 덮은 붕대. 언제 두었는지 모를 차갑게 식은 수프. 소년은 꺼졌던 기억을 다시금 되돌렸다. 아파.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신의 벌이다. 가브리엘.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등불이 제 몸 위에서 깨져 불이 붙었다. 뜨거워서 기절할 것 같았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쉽게 꺼지지 못했다. 


다 타버린 수도복 대신 새 수도복을 입은 소년은 양손에 가득 채워진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화상을 입은 등이 아픈지 계속 입술을 깨물었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기도실. 벽과 바닥과 제단이 온통 하얀색인 그 기도실로 소년의 발걸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소년은 웃었다. 그믐달이 뜬 밤이었다. 수도원은 고요했고, 깨어있는 사람은 없었다. 소년은 양동이를 기도실에 부었다. 검은 페인트. 기름 냄새가 기도실을 가득 뒤덮는다. 하얀색이 검게 덧칠되어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계속 웃었다. 소년은 깨달았다.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


수도원은 난리가 났을 것이 분명했다. 무려 일곱 통이나 되는 페인트를 그 기도실에 부어버렸으니까. 소년은 수도원의 담을 넘어 그곳을 탈출했다. 걷고, 누군가의 차를 얻어 타고, 미카엘이 준 은 묵주의 알을 하나하나 빼어 조금 더 먼 도시로 떠났다. 아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자신이 배운 악마처럼 새하얗게 탈색하고, 갈색의 수도복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이미 죽은 사람이 지어준 제 이름마저 함께. 소년은 도시의 길거리에서 주먹으로 살아남는 법과, 조금 더 능숙하게 주머니를 터는 법을 익혔다. 소년은 신을 버렸고, 스스로 악마가 되고자 했다. 그렇게, 나폴리의 어린 아이는 어느새 사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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